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어니스트 킹 (문단 편집) == 일생 == 그의 부친은 [[아일랜드계 미국인|아일랜드계]] 이민자였다. 외조부는 [[영국]]의 선박공으로 일하기도 했고 그의 부친은 한때 [[오대호|이리 호]]에서 뱃일을 한 적도 있었다.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여 [[고등학교]]에 가는 게 고작이었고 가정 형편상 1897년에 [[미국해군사관학교]]에 진학한 그는 재학 중 일어난 [[미서전쟁]]에 지원해 [[순양함]] [[샌프란시스코]]에서 근무한다. [[1901년]]에 졸업할 당시 67명 중 4등의 성적으로 졸업한다. [[소위]] 후보생[* 이 당시 미국에서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도 [[준사관]] 내지 [[사관후보생]] 신분으로 1년 이상 복무하다 소위 임관 시험을 통과해야 비로소 소위가 될 수 있었다.]이 된 이후 [[전함]] 일리노이에서 근무하나 부장과의 다툼으로 인해 순양함 신시내티로 옮겨간다.[* 신시내티에서 근무중에 목격한 것이 [[러일전쟁|제물포 해전]]이다.] [[전간기]]에는 파일럿 자격을 취득한 후 [[항공모함]] [[렉싱턴]]의 함장으로 근무한다. 근무 시기에 대일 전략을 검토하는 과제에 "적 [[일본 제국|오렌지]][* [[일본 제국]]을 말한다. 이는 미국의 전간기 [[컬러코드 전쟁 계획]]에서 기인한 것인데, 미국은 각국에 색을 부여하고 그에 따른 전쟁 계획을 수립했었다. [[영국]]은 빨강, [[독일]]은 검정, 자국인 미국은 파랑인 식이다. 참고로 영국이 왜 끼어 있나 싶을 수 있겠지만 놀랍게도 영국 및 캐나다, 호주 등 식민지에 대한 전면적 공격 계획인 워 플랜 레드는 이 중에서도 '''가장 세심하게 계획되었고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었다.''' 당시는 미국이 영국과 캐나다(전쟁 당시는 아직 영국 식민지였지만)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지 불과 100여년이 지난 시점이고, 미국이 아메리카에서 패권을 잡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될 유럽국가를 꼽는다면 단연 영국이었다. 다른 방해물인 스페인과는 근래에 [[전쟁|미국-스페인 전쟁]]을 치른 바 있었다. 1974년 이 기밀이 해제되자 미영관계와 미국-캐나다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할 정도. 영국이 미국 대리인 비슷하게 된 오늘날과 비교하면 격세지감.]는 미국을 [[과달카날 전역|불리한 대외전]]으로 이끌어서 타격을 줄 것이다. 이를 위하여 오렌지는 [[필리핀]], 나아가서 [[하와이]]를 [[진주만 공습|공격할 가능성]]도 있으며 미국은 오렌지와의 싸움에서 [[진주만 공습|몹시 불리한 수단과 방법밖에 주어지지 않은]] [[태평양 전쟁|전쟁]]에 휘말리는 것을 예측해야 한다"라고 써냈는데[* 지금은 항공모함이 중심이 되는 항공전단이 해군의 핵심병기지만, 이 때까지만 해도 아직까지 해군의 중심은 전함이었고, 항모는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평가되었다. 그러나 거함거포주의가 종말하고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전쟁 초기 전함이 무력화된 미국이 항모로 일본을 역관광시키면서 항모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.], 이는 그의 일본 여행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었지만 '''[[태평양 전쟁|놀랍게도 이후 일본과의 전쟁은 저때의 예상과 아주 비슷하게 흘러갔다.]]''' [[1933년]]엔 [[소장(계급)|소장]]으로 진급, [[1938년]]엔 [[중장]]으로 진급했으며 [[1939년]]에는 장관회의의 멤버가 된다. 원래는 퇴역을 기다릴 지위였지만 찰즈 에디슨 해군장관의 미합중국 함대 관열의 수행원이 되었을 때 함정의 [[대공포]] 대책을 명받았고 통상 3년이 걸릴 일을 겨우 3개월만에 끝낸 데서 [[칼 빈슨]] [[미국 하원]]의원의 눈에 들게 된다. [[1940년]] 7월에 양양함대법이 성립되어 [[대서양]] 함대가 발족하자 [[프랭클린 루즈벨트]]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대서양함대 사령관에 취임한다. 그리고 1941년엔 드디어 [[대장(계급)|대장]]으로 진급한다. 이후 [[진주만 공습]]이 일어나자, 그 보고를 한 부관에게 "그래, 난 이리 될 줄 알았어!"라고 소리쳤다. 그리고 1941년 12월 16일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의 지명을 받아 미합중국 함대 사령관 겸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다. 이 때,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세가지 조건을 요청하였다. 첫번째는 함대 사령관 직의 약칭 변경,[* 당시 미합중국 함대 사령관(Commander in Chief of the U.S. Fleet)의 약자는 'CINCUS'였는데 이를 그대로 읽으면 'Sink us', 즉 "[[자폭|우리를 가라앉힘]]"과 똑같은 발음이 되어버려 이를 바꾸어 줄 것을 요구했다. 이후 약칭은 'COMINCH'로 바뀌게 된다.] 두번째 조건은 '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의회에 불려나가 증언 등을 하지 않게 해줄 것'이었고 마지막 세번째는 '독립적인 봉건 영주 수준으로 해군 전반에 대한 권한을 줄 것'이었다. 루스벨트는 이 중 앞의 두 가지는 그대로 승인했고 마지막도 법률을 고치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킹에게 협조하지 않는 자는 즉시 잘릴 것이라고 확언한다. 그렇게 킹은 미 해군 사상 최대의 권한을 휘두르게 된다. 이후 [[태평양 전쟁]] 동안 미 해군을 지휘하게 된다. [[과달카날 전역]] 이후에는 [[태평양]]의 주요 거점들만 돌파한 이후 대만을 점령해 해상 보급로를 끊은 뒤, 일본 본토로 진격하자는 의견을 내세워서 [[더글러스 맥아더]]와 대립하기도 한다. 꼭 이 문제가 아니어도 원래 불같은 성격이라 맥아더와는 상극이었고 이 둘을 중재하느라 니미츠가 고생할 수 밖에 없었다.[* 맥아더는 [[필리핀 탈환전]]을 결정한 루스벨트가 참석한 진주만 회의에서 필리핀 루트에 대한 브리핑을 하던 도중, "멍청한 정면공격은 평범한 지휘관만이 한다."라는 발언을 던졌다. 대만을 정면공격하자는 킹이나, [[타라와 전투]]에서 닥돌했다가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낸 홀랜드 스미스 등 해병대를 대놓고 깐 것. 심지어, 41년 바탄 반도 죽음의 행진도 해군이 무기력하게 먼저 전멸해서 그런거다라는 발언까지 했다. 이런 말 면전에서 하면 바로 멱살잡을만한 성깔의 킹은 그래서 진주만에 부르지도 않았는데, 킹 대신 듣고 있었던 니미츠 속이 어땠을지...]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. 45년 12월 15일엔 자신의 자리를 [[체스터 니미츠]]에게 넘기고 은퇴 생활을 보내다 47년 [[뇌출혈]]이 발생해 병원에 입원한 이후 일어나지 못한다. 결국 56년 6월 26일 77세에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